커피이야기


초코미야님이 쓰신 커피에 얽히 이야기를 읽고, 답글을 남기려다 이 참에 나의 커피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졌다. 

요즘 직장에서 사소하면서도 큰 불만 중의 하나가 커피 메이커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사연이 좀 있다). 즉  각자 알아서 아침 커피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커피는 아침에 한 잔만 마시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그 딱 한 잔이기 때문에 반드시 마셔야 하는 습관이 붙어버린 나로서는 참 괴롭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사먹으려니 매일 아침 도루하듯 '슬라이딩 인'를 하고 있는 처지에 커피를 살 여유따윈 없을 뿐더러, 그 커피를 사기 위해 10분을 먼저 나오는 것도 왠지 억울하고, 그 사먹는 데서 추가로 드는 돈도 아깝고, 맛도 그다지 보장할 수 없는 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 할 수 없이 모카커피 믹스를 사다가 머그 컵에 물을 전자렌지로 데워 타먹는 걸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커피 마시려고 직장 다니는 것도 아니고.. 쩝. 
 
취직을 하기 전, 지금은 주말 정도 밖에 즐길 수 없게 되긴 했지만 좋아하는 커피가 있다. 어쩐지 커피와 레드와인의 취향이 비슷해져버렸는데, 신맛/쓴맛 없이 깊고 부드러운 맛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맛이다. 아무튼 그런 커피는 일반 grocery store에서는 아예 기대할 수 없고, 스타벅스 같은 진하고 쓴 커피가 10중의 9 비율로 나오는 체인점, 아니 최소 그보다 더 맛있다는 커피 체인점에서도 내 취향의 맛이 나오는 것에는 늘 운에 맡겨야 한다. 때문에 최소한 집에서 마실 때 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맛으로 마시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원두커피 만들어 마시기. 


원두커피를 가는 기구라던가 에스프레소나 카푸치노를 만들어주는 사치스런 기계 따윈 없다. 주방에 부피를 차지할까봐 커피메이커도 사지 않았다. 그저 홀라당 저 프렌치 프레스기만 갖고 커피를 만들어 마셔야 하는데. 우선 중요한 것은 원두를 잘 사야 하는 것이겠지. 원두에 관한 지식이 일천하여 그냥 내가 좋아하는 곳이자 요즘 뉴욕에서 빠른 속도로 확장세를 타고 있는 whole food market 에 간다. 각종 원두들이 맛에 대한 설명과 함께 풍성하게 진열되어 있는데, 가장 맘에 드는 것이 사진으로 보는 이것. Bel Canto. 1파운드면 1파운드, 10달러어치면 10달러어치, 원하는 만큼의 양을 말하고 french press 용으로 갈아달라고 하면 즉석에서 갈아 봉지에 담아준다. 에스프레소 계열인데 보통 커피의 1.5배 정도의 양에 뜨거운 물을 넣고 2-3분 정도 기다려 압착한 후 커피를 담아낸다. 가끔 압착기를 위아래로 움직어 거품을 낸 후 마시기도 하는데, 공기가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인 지 쓴맛이 더 사라지고 몽글몽글한 맛이 나는 것 같다. 시고 쓴맛이 나는 걸 피하려면 특히 짧은 시간 내에 우려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물의 온도까지 재는 데까지는 공력이 미치지 못한다. 보통 차를 마실 경우 70도 정도의 물이 떫은 맛이 없고 색깔도 예쁘게 나오는데, 과연 커피도 비슷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커피를 만들면 10에 9 이상, 내가 원하는 맛의 커피가 된다. 진한 블랙으로 마셔도 부드럽게 넘어가는 커피. 에스프레소가 작은 잔에 담기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진한 커피는 최고로 깊고 풍부한 맛의 정점에서 금방 시고 쓴 맛으로 변한다.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는 기억만을 남기기 위해서는 커피를 내리자마자 딴 짓 말고 열심히, 음미하며, 재빨리 마셔주는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커피 마시며 컴 끼고 딴짓하는 게 일상화된 아니스는 내린 커피의 절반만을 맛나게 마시고, 그 나머지 절반의 변절에 매번 애도와 반성을 해야만 했다고.     



Bill Evans - Waltz for Debby

by Annis | 2007/07/19 10:05 | 잡담 | 트랙백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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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IamDYING at 2007/07/19 11:18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창문을 열어 놓고, 커피에 관한 글을 읽으니까, 커피 향이 솔솔 느껴지네요. 묻득, 아주 어렸을 때, 아침마다 어머니께서 드시던 커피가 생각까지 나네요. 그 땐 그게 왜 그리 맛 보고 싶었는지ㅎㅎ 전 요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시원한 쓴 맛과 열애(?)중이랍니다. (덧. '슬라이딩 인' 이란 표현 재밌어요!)
Commented by 은갈 at 2007/07/19 14:18
와 커피가 전문적으로 다가와요/ 왠지 커피를 마시고싶은느낌이 들어요. 직접원두를 갈아서 먹어본적이 한번인가 밖에 없어서(그것도 한모금..) 그떄의 기억밖에 없는데 글에 써있는 몽글몽글의 느낌을 느껴보고싶네요 몽글몽글몽글몽글(...) 왠지 맛이 귀여울껏같아요 /ㅅ/
Commented by Fyodor at 2007/07/19 20:34
하하 맞아요! 지금 제 키보드 옆에 맛의 정점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절반의 커피가 있답니다.
Commented by 소리 at 2007/07/20 00:06
좋네요. 빌 에반스 아저씨의 왈츠 포 데비도 커피 이야기도. :)
뭔가 따뜻하게 마시고 싶어집니다.
Commented by 하류방랑자 at 2007/07/20 00:25
커피와 에반스의 음악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유는...대체 무엇일까요..
눈물나게 좋은 음악을 듣고 있으니 이 밤도 행복하게 느껴지는군요.
좋은 포스팅~ 잘 읽었어요^^
Commented by Annis at 2007/07/20 09:59
IamDYING 님 / 이곳도 비가 틈틈이(?) 오고 있습니다. 아이스 커피가 정말 맛나게 만들기 어려운 것 같아요..
Commented by Annis at 2007/07/20 10:02
은갈 님 / 예 Bel Canto라는 이름 처럼 '아름다운 노래'같은 느낌의 커피여요. 비오는 날 뿐 아니라 화창한 아침도 잘 어울리는 생기발랄한 커피입니다. ^^
Commented by Annis at 2007/07/20 10:02
Fyodor 님 / 하하하 만나서 반갑습니다~
Commented by Annis at 2007/07/20 10:05
소리 님, 하류 방랑자 님 / 이 곡 너무 좋죠 ㅠㅠ 사실 포스팅하려고 세이브해 놓은 곡인데 하필 커피에 관해 먼저 쓰는 바람에 ... ;; 그래도 꼭 한 번 포스팅 해보고 싶은 곡입니다. ^^
Commented by marlowe at 2007/07/20 19:03
베트남에 갔다가 커피 사지 않고 그냥 온 게 후회가 되네요.
비오는 날이면 커피 향기에 취하고 싶습니다.
Commented by Annis at 2007/07/20 19:48
marlowe 님 / 커피향기에 취하든 홍차향기에 취하든 비오는 날에 창밖보면 느긋하게 감상에 젖을 여유가 있다면!!!! ㅠㅠ
Commented by Asuka_불의넋 at 2007/07/22 21:52
전 항상 '끓는 물에 우려낸 차나 커피가 맛있다'는 신조로 커피나 차 끓일 땐 정말 90도 넘어가게 펄펄 끓였는데 좀 덜 데워야 맛있나 보군요.

좋은 지식 얻고 갑니다 :)
Commented by 김둥이 at 2007/07/24 19:48
다~ 필요없고 물1잔에 커피믹스7개 타면 일주일 배 아픕니다...

밤새볼꺼라고 해봤더니 배아파서 밤샜어요...ㅋㅋ
Commented by Annis at 2007/07/25 09:28
불의넋 님 / 오늘 커피 프린스 보니까 95도가 좋다는 말을 언듯 들은 것도 같은;;;
Commented by Annis at 2007/07/25 09:29
김둥이님 /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ㅎㅎㅎ 9월 병장 진급 축하해요~
Commented at 2007/07/27 18:2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7/07/28 05:4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Annis at 2007/07/28 18:42
비공개 (1 )/ 어이~ 참 신기하네. 안 그래도 소식이 궁금하던 참인데. 커피에 관한 글을 쓰다보니 자연스럽게 네가 연상된 것도 있는 것 같고...
그래, 잘 지내고? 나야 뭐 늘 다이나믹하게 잘 살고 있단다. 난 9월에 한국 다녀오는데 요즘 네 활동범위가 어디인지 모르겠네. 연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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